부마민주항쟁이란

부마민주항쟁이란?
부마민주항쟁은 1979년 10월 부산과 마산의 시민과 학생들이 박정희 유신독재에 대항하여 일어난 민주화운동이다. 1970년대 유신체제의 폭압 속에서 자유와 민주, 정의를 위해 분연히 떨쳐 일어나 사실상 유신독재의 붕괴를 아래로부터 촉발한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에서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부마민주항쟁의 의미
1979년 10월 16일 박정희 18년 군부독재에 맞서 부산대학교에서 시작된 항거는, 부산의 도심으로 번졌고 18일에는 마산으로까지 나아가 유신독재 최초이자 최대의 시민항쟁으로 타올랐다. 서슬 퍼런 유신독재 시기에 부산과 마산의 시민은 “유신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며 18년 군부독재가 무너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부마민주항쟁의 10월 정신은 이듬해 5월 광주에서 5·18민주화운동으로 이어져 군부독재에 대한 저항은 더욱 강력해졌다. 1979년 10월 부마와 1980년 5월 광주는 모두 군부독재에 대한 저항에서 출발한 하나의 사건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1987년 6월 전국적인 규모로 계승된, 군부독재에 대한 저항은 이 땅에서 군부독재를 영원히 몰아내었다.

부마민주항쟁은 5·18과 쌍생아이며 6·10민주항쟁의 도화선이었다. 결국 부마민주항쟁은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에서 군부독재의 사슬을 끊어내고 우리나라 민주주의가 면면히 이어질 수 있게 한 시발점이자 원동력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촛불혁명으로 그 정신은 계승되어 평범한 시민이 이 나라의 진짜 주인임을 알게 한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살아 있는 역사이다.

부마민주항쟁의 배경

유신체제, 한계에 봉착하다
박정희 정부의 유신체제는 1979년 한계에 이르렀다. 반정부 인사들에 대한 연행·체포·고문·연금 등의 탄압 속에서 야당과 재야세력의 저항이 고조되었다. 1979년 8월, YH무역 여성 노동자들이 신민당사에 들어가 부당폐업을 반대하며 농성을 벌이다가 경찰의 폭력적인 진압으로 22세 여성 노동자가 사망하고 수많은 부상자가 발생했다.

1979년 10월 초 김영삼 신민당 총재는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박정희의 유신독재를 강력히 비판하였고, 이를 빌미로 박 정권은 김영삼을 의원직에서 제명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으로 시민들은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독재와 공화당에 염증을 느끼게 되었으며, 그 분노가 부산과 마산에서 대규모 항쟁으로 나타났다.

부산·마산 지역의 경기침체
1970년대 말 수출 중심의 한국 경제는 제2차 오일쇼크라는 세계자본주의체제의 위기와 결합해 심각한 위기에 빠졌다. 물가가 상승하고 경기가 침체되었으며, 불황으로 서민들의 삶은 더욱 힘들어졌다. 경제적 모순이 극명하게 드러난 곳은 저임금 노동자를 바탕으로 한 수출지향적 경공업 도시였던 부산과 마산이었다. 정부는 위기를 해소하기 위해 중소자본가, 봉급생활자, 도시 노동자와 농민 등에게 안정화 비용을 부과할 수밖에 없게 됐다. 이러한 부가가치세 도입은 사회적 불만을 더욱 증폭시키는 기폭제 역할을 했다.

부마민주항쟁 타임라인

부산, 항쟁을 시작하다

1979년 10월 16일
부산대학교 구내 도서관 앞에서 약 500명의 학생이 모여 반정부 시위를 벌이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동아대학교 학생들까지 합류하여 시위대는 부산 시내 중심가까지 진출하였고, 이를 막으려는 경찰과 곳곳에서 충돌하였다.

1979년 10월 17일
17일 시위에는 시민들이 합세하기 시작했다. 야간시위에서 시위대는 3만에서 5만 명에 이르렀다. 시위대에는 화이트칼라, 노동자, 상인, 업소 종업원, 무직자, 반실업상태 자유노동자, 고교생들도 동참했다. 밤늦게까지 계속된 시위에서 시민·학생들은 KBS부산방송국과 도청·세무서·파출소 등을 파괴하였고, 일부 경찰차량과 보도기관의 취재차량도 피해를 입었다. 이는 바로 정부의 독재, 언론의 소극적 태도, 부가가치세 도입에 대한 불만의 폭발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1979년 10월 18일
사태가 심상치 않게 확대되자 부마항쟁에 대해 박정희 정부는 강경책으로 대응했다. 정부는 18일 새벽 0시를 기해 부산 일원에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마산으로 확산된 항쟁

1979년 10월 18일
부산에서 시작된 항쟁은 18일에 마산으로 퍼졌다. 1,000여 명의 경남대학교 학생들이 마산 시내 번화가에 산발적으로 집결, 일부 시민들도 가담하여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시민·학생들의 데모는 격화되어 파출소·공화당사·방송국·신문사에 투석, 유리창을 파괴하였다.

1979년 10월 19일
19일에는 더욱 치열해져 마산 시내는 한때 무정부 상태가 되었다. 이날 저녁 8시경, 시위대는 경남대학교와 마산산업전문대학교, 그리고 일부 고교생까지 합세하여 약 8,000명에 이르렀다.

1979년 10월 20일
부산 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한 지 2일 뒤인 10월 20일 정오를 기해 정부는 경상남도 마산 및 창원 일원에 위수령을 발동하였다. 이와 함께 마산 지역 작전사령부는 마산 일원에 군을 진주시켜 공공건물에 대한 경계에 들어갔다. 계엄령이 선포된 부산 지역에는 공수부대가 동원되어 시위하는 시민과 학생에 대해 강도 높은 진압이 이루어졌다.

1979년 10월 26일
항쟁이 소강상태에 빠진 상황에서 일주일도 안 되어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박정희를 저격한 10·26 사건이 발발하였고 유신체제는 막을 내렸다.